문틀 연필 자국이 수학 선생님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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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7일. 딸 키를 처음 잰 날이에요. 100cm. 종이에 적어서 문틀에 붙였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5년 지난 지금, 딸은 132cm가 됐어요. 종이에 빼곡히 적힌 숫자들 보면서 딸이 배운 건 키만이 아니었어요. 100cm부터 시작했어요 딸이 다섯 살 때였어요. "엄마, 나 키 얼마야?" 물어보길래 재봤어요. 100cm 딱. "우와! 백!" 딸이 좋아했어요. 100이라는 숫자가 뭔가 특별해 보였나 봐요. "엄마, 100은 진짜 큰 숫자지?" 종이 꺼내서 적었어요. '2021. 1. 7 - 100cm' 문틀에 테이프로 붙이고, 그 위치에 연필로 줄 그었어요. "이게 네 키야." 딸이 선 옆에 서서 확인했어요. "진짜네! 여기까지가 나구나." 그날부터 가끔씩 그 선 옆에 서서 비교했어요. "엄마, 나 아직 여기야?" 한 달에 한 번씩 쟀어요. 처음엔 변화가 없었어요. 100cm, 100cm, 101cm. "엄마, 1cm 컸어!" 딸이 소리쳤어요. "1cm가 얼마나 큰 건데?" "손가락으로 이만큼!" 딸이 손가락 두 개로 간격 보여줬어요. "맞아, 1cm는 이만큼이야." 6개월 지나니까 105cm 됐어요. "엄마, 백에서 백오가 됐어! 5 늘었어!" "그럼 얼마나 큰 거야?" "음... 1cm가 다섯 개니까..." 손가락으로 세더라고요. "이만큼! 진짜 많이 컸다!" 5cm가 얼마나 큰지 손으로 느낀 거예요. 1년 지나니까 110cm 됐어요. "우와! 백십! 10 늘었어!" 딸이 계산했어요. "백에서 백십까지 10이야. 10cm 큰 거야!" 종이에 적힌 숫자들 보면서 비교했어요. 100, 101, 102... 110...

너덜너덜해진 책 한 권이 전집보다 나았어요

딸이 또 그 책을 들고 왔어요. "잠이 안 와"라는 그림책.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요. 어제도 읽었는데 오늘도 또래요.

처음엔 저도 답답했어요. 새 책 많은데 왜 맨날 똑같은 책만 읽으려고 하지? 근데 지금은 알아요. 그 책 한 권이 비싼 전집보다 나았다는 걸.

전집도 읽긴 했는데

딸이 세 살 때 전집 샀어요. 명작동화 전집. 한 세트에 몇십만원.

영업사원 말이 그럴싸했거든요. "요즘 애들 다 읽어요", "이거 읽으면 문해력 쑥쑥" 이랬어요. 거실 책장 한쪽 가득 채워놓으니까 보기엔 멋있더라고요.

어릴 땐 그래도 읽어줬어요. 전집 중에서도 몇 권은 괜찮았고, 제가 고르는 대로 따라오긴 했죠.

근데 문제는 딸이 크면서였어요. 여섯 살, 일곱 살 되니까 전집은 잘 안 보더라고요. "이거 재미없어" 하면서요.

그 대신 서점 가서 자기가 직접 고른 단행본은 수도 없이 읽었어요. 전집보다 단행본을 훨씬 더 좋아했어요.

양이 귀여워서 고른 책

네 살 때 서점 갔다가 딸이 직접 고른 책이 있었어요. "잠이 안 와"라는 그림책. 양 그림이 귀여워서 골랐대요. 그게 이유의 전부였어요.

그날 밤부터 매일 읽어줬어요. 이틀, 사흘,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똑같은 책만 읽어달라고 했어요.

처음엔 좀 짜증났어요. 맨날 같은 책만 읽으니까. 근데 애 표정을 보니까, 진짜 좋아하더라고요. 눈 반짝반짝하면서 책장 넘기는 거 보면서 생각했어요. '그냥 읽어주자.'

한 달쯤 지나니까 딸이 먼저 다음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책 내용을 다 외운 거예요. 두 달쯤 지나니까 혼자 중얼거리면서 책장 넘겼어요. 글은 못 읽는데, 내용을 다 알아서 혼자서도 "읽는" 거예요.

세 달쯤 지나니까 이상한 걸 발견하더라고요. 양 잠옷에 그려진 작은 별, 배경에 있는 시계 그림. 제가 못 본 디테일을 애가 찾아내요. 수도 없이 읽었더니 그림 구석구석까지 다 보는 거예요.

왜자야 하나요?라는  책은 수없이 밤마다  읽엇던책

새 책보다 낡은 책이 좋대요

일 년쯤 읽었을까요. 책이 진짜 너덜너덜해졌어요. 표지 모서리 다 닳았고, 페이지 여기저기 찢어지고, 손때 묻어서 까매졌고.

똑같은 책 한 권 더 샀어요. 근데 신기하게도, 딸은 새 책보다 낡은 책을 더 좋아했어요. "이게 우리 책이잖아."

그 말 듣는 순간 좀 뭉클했어요. '우리 책'이래. 얼마나 많이 읽었으면 '우리 것'이 된 거예요.

"잠이 안 와" 책을 1년 넘게 읽었을 때쯤 딸이 물어봤어요. 비슷한 책 없냐고. 양 나오는 거, 잠 자는 거.

그래서 비슷한 주제 책 몇 권 빌려왔어요. 그랬더니 그것도 재밌어하더라고요. 한 권을 깊이 읽으니까, 비슷한 책도 재밌는 거예요. 뭔가 연결되는 느낌이 있나 봐요.

그렇게 조금씩 읽는 책이 늘어났어요. 억지로 안 시켰는데, 스스로 찾아서 읽더라고요.

차이는 누가 골랐느냐였어요

전집도 어릴 때 꽤 읽었어요. 근데 크면서 자기가 고른 단행본을 훨씬 더 많이 읽었어요.

뭐가 달랐을까요?

전집은 제가 고른 거예요. "이거 좋대", "이거 읽어야 해" 하면서. 단행본은 딸이 고른 거예요. "양이 귀여워서", "표지가 예뻐서" 같은 단순한 이유로.

차이가 거기 있었어요. 누가 골랐느냐.

지금 딸 10살이에요. 책 진짜 많이 읽어요. 학원 안 보내도, 학습지 안 해도, 책은 스스로 찾아서 읽어요.

어떻게 그렇게 됐냐고요? 한 권을 정말 많이 읽었거든요. 자기가 고른 책을. 그게 시작이었어요. 책을 좋아하게 된 건.

전집 사도 괜찮아요. 어릴 땐 도움 돼요. 근데 거기에만 의존하지 마세요. 서점 가세요. 딸 데리고. 딸이 고르고 싶은 책 하나만 고르게 해주세요.

그렇게 고른 책 한 권, 매일 밤 읽어주세요. 아이가 또 읽어달라고 해도 짜증내지 말고 그냥 읽어주세요.

같은 책 열 번, 스무 번, 수도 없이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딸이 책을 진짜 좋아하게 돼요. 그게 진짜 독서교육이에요. 양이 아니라 깊이.

우리 집 거실에 아직도 있어요. 너덜너덜해진 "잠이 안 와" 책. 버리지 않았어요. 가끔 딸이 꺼내서 봐요. 어렸을 때 제일 좋아했던 책이라면서.

한 권이 전집보다 값진 거 있잖아요. 저희 집은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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