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보며 한글 배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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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다섯 살 때 치킨집 앞 지나가는데 갑자기 소리쳤어요. "엄마, 저기 치킨!" 한글 학습지 한 번도 안 시켰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요? 간판에 치킨 사진이 있고, 그 옆에 글자가 있으니까 알았대요. 사진이랑 글자를 같이 보니까 알게 된 거예요.
학습지 대신 길거리 간판
주변에서 "요즘은 다들 한글 학습지 한다"고 할 때도 안 시켰어요. 이유요? 하얀 종이에 '사과', '포도' 적혀있는 거 보면 재미없어 보이더라고요. 아무 맛도 안 나고, 아무 의미도 없고.
차라리 길 걷다가 "저기 문구점이야" 하는 게 훨씬 재밌잖아요. 진짜 문구점 앞에서, 진짜 간판 보면서, 진짜 필요한 순간에 배우는 거. 그게 더 자연스럽고,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어요.
딸이 네 살쯤 됐을 때부터 길 걸으면서 간판 많이 읽어줬어요. "여기는 편의점이야", "저기는 빵집이고", "여기 문방구 가볼까?" 그냥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공부시킨다는 느낌 전혀 없이.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 애가 먼저 찾더라고요. "엄마, 저기 카페지?" 하면서요. 'ㅋ'자가 보여서 알았대요. 완벽하게 읽은 건 아니에요. 근데 중요한 건, 글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다섯 살 여름쯤이었나. 산책 나갔다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멈춰 섰어요. "엄마, 여기 아이스크림이야?"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까, 사진 보니까 아이스크림이니까 글자도 '아이스크림'이겠지 했대요. 사진이랑 글자가 같이 있으니까 추측하는 거예요. 이게 진짜 문해력 아닐까요?
그 뒤로 길 걸을 때마다 놀이가 됐어요. "엄마, 저 간판 뭐라고 써있어?" 하면 "한번 맞춰볼래?" 하고요. "음... 병원?" "오! 맞았어!" 틀려도 괜찮았어요. "아, 이건 약국이야. 비슷하네?" 하면서 웃고 넘어갔어요.
학습지처럼 틀리면 빨간 줄 그어지는 게 아니니까, 애가 부담 없이 계속 도전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길거리 간판이 최고의 한글 교과서였어요. 매일 보고, 실제로 쓰이고, 재미있고.
간판에서 책으로 자연스럽게
간판 읽기 시작하니까 책 읽는 것도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엔 그림만 보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글자도 보기 시작했어요. "엄마, 여기 토끼라고 써있지?" 하면서요. 간판에서 본 글자를 책에서도 찾아내는 거예요.
그때부터 책 읽어줄 때 가끔 물어봤어요. "여기 뭐라고 써있을 것 같아?" 완벽하게 못 읽어도 괜찮아요. 추측하는 거 자체가 중요하니까. "강아지?" "거의 맞았어! 고양이야. 강이랑 고가 비슷하게 생겼지?"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갔어요. 억지로 가르친 적 없는데, 스스로 익히더라고요.
일곱 살쯤 되니까 짧은 책은 혼자 읽기 시작했어요. 간판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이어진 거죠. "엄마, 나 이거 혼자 읽을 수 있어!" 처음 혼자 책 한 권 다 읽었을 때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요. 엄청 뿌듯해했어요.
학원 한 번 안 갔는데, 학습지 한 장 안 했는데, 한글을 뗐어요. 물론 완벽하진 않았어요. 받침 헷갈리고, 띄어쓰기 엉망이고. 근데 그게 뭐 중요해요? 읽고 싶어서 읽는 마음이 생긴 게 제일 중요하죠.
일상이 곧 배움이었어요
지금 10살인 딸, 길 걸으면서도 여전히 간판 읽어요. "엄마, 저기 신상품 30% 할인이래!" "엄마, 저 카페 이름 재밌다. 커피 한 잔의 여유." 글자를 읽는 게 일상이 된 거예요. 공부가 아니라 생활이 된 거죠.
가끔 엄마들이 물어봐요. "한글 어떻게 가르쳤어?" 특별한 거 없어요. 그냥 길 걸으면서 간판 읽어줬어요. 재밌게,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학습지 안 해도 돼요. 학원 안 가도 돼요. 우리 주변에 교과서가 널려 있어요. 간판, 표지판, 상품 이름, 메뉴판. 사교육 없이 10년 키운 비결이라고 거창한 게 아니에요. 그냥 일상이 곧 배움이었어요.
길 가다가 "저기 뭐라고 써있을까?" 한마디만 던져주세요. 그게 시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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