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관계는 날씨같은 거더라고요
"엄마, ○○이가 오늘 나한테 인사도 안 했어." 학교 갔다 온 딸 목소리가 살짝 떨리더라고요. 가방 던지고 신발도 제대로 안 벗고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평소랑 달랐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깔깔대며 놀던 친구였는데.
초4 되고 나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어제의 단짝이 오늘은 차갑고, 지난주에 삐졌던 애가 이번 주엔 또 친하고. 아침에 학교 갈 때 신나게 나갔다가 오후엔 풀 죽어서 돌아오고. 정신없어요.
처음엔 저도 당황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나?" "가서 물어봐" "먼저 사과해" 이런 말들만 했죠. 아이 마음보다 문제 해결이 급했던 거예요. 근데 몇 달 지나면서 알았어요. 이건 제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좀 다르게 봐요.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요
지난달인가, 비 오는 날이었어요. 딸이랑 우산 쓰고 학원 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더라고요. "엄마, 비 그만 오면 안 돼?" "그치? 엄마도 비 싫은데, 우리가 멈추게 할 수 없잖아. 대신 우산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구 관계가 딱 날씨 같네.' 맑았다가 흐렸다가, 어제는 화창했는데 오늘은 소나기. 내가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듯이, 친구 마음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잖아요. 친구가 기분 나쁜 날도 있고, 피곤한 날도 있고, 다른 친구랑 더 놀고 싶은 날도 있는 거예요.
그날 저녁에 딸한테 말했어요. "있잖아, ○○이 마음은 ○○이의 날씨야. 네가 햇빛을 만들 수는 없어. 억지로 맑게 만들려고 하면 너만 힘들어져. 근데 비 와도 우산 쓰면 안 젖잖아?"
딸이 "우산이 뭔데?" 하길래 "친구가 차갑게 대해도, 네 마음까지 흠뻑 젖지 않게 지키는 거. 그게 우산" 이랬어요. 딸이 한참 생각하더니 "아, 그럼 ○○이가 나한테 짜증 내도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는 거네?" 하더라고요. "맞아, ○○이 날씨가 흐린 거지 네가 비를 오게 한 건 아닐 수 있어."
우산 쓰는 연습
요즘 딸이 친구 얘기하면 제가 먼저 묻지 않아요. 그냥 들어줘요. "○○이가 나만 빼놓고 △△이랑 놀았어." "그랬구나. 많이 속상했겠다." 이것만 해줘도 돼요. 해결책 안 줘도 돼요.
한 10분쯤 지나면 딸이 스스로 정리해요. "엄마,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 요즘 학원 늦게까지 다녀서 피곤한가 봐. 내일 괜찮냐고 물어볼래." 이게 우산 쓰는 거예요. 친구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거.
날씨 일기장
한 달 전부터 재밌는 거 시작했어요. 딸이랑 '친구 날씨 일기'. 저녁 먹고 나서 "오늘 ○○이 날씨는 어땠어?" 물어봐요.
"음... 구름 조금? 아침엔 웃었는데 점심 때 갑자기 시무룩해졌어." "그랬구나. △△이는?" "완전 맑음! 같이 줄넘기 엄청 했어." "◇◇이는?" "폭풍! 쟤 오늘 진짜 화났었어. 근데 나한테 화낸 건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 딸이 패턴을 찾아내요. "엄마, ○○이는 월요일마다 날씨가 안 좋은 것 같아. 주말에 엄마랑 싸우나 봐. 그리고 △△이는 수학 시험 보는 날은 항상 예민해."
친구를 탓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게 되는 거죠. '아, 쟤도 쟤 나름대로 힘든 게 있구나.' 신기한 건, 이거 하면서 딸이 친구들 눈치를 덜 보게 됐어요. 예전엔 "○○이가 나 싫어하나 봐" 이랬는데, 지금은 "○○이 오늘 날씨 안 좋네. 내일은 나아지겠지" 해요.
감정을 이름 붙이는 연습
딸이 6~7살쯤부터 감정 관련 책을 많이 사줬어요. '감정 표현 사전', '마음 날씨', '기분을 말해봐' 이런 그림책들요. 처음엔 그냥 재밌어 보여서 샀는데, 지금 보니 이게 정말 도움이 됐더라고요.
책 보면서 "이건 질투야", "이건 서운함이야", "이건 외로움이야" 이렇게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연습을 했어요. 요즘 딸이 친구 얘기할 때 이렇게 말해요. "엄마, 오늘 ○○이한테 질투 났어. 쟤가 선생님한테 칭찬받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이 미워!" 이랬을 텐데, 지금은 자기 감정을 정확히 아는 거예요. 미움이 아니라 질투라는 걸. "그랬구나. 질투 나는 게 당연해. 너도 칭찬받고 싶었을 테니까." "응. 근데 ○○이가 열심히 해서 칭찬받은 거니까 나도 열심히 하면 돼."
이렇게 자기 감정을 이해하고 나면, 친구 탓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내가 지금 화난 건 친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서운해서구나' 이걸 아는 거죠. 감정 책은 지금도 가끔 꺼내봐요. 기분 복잡할 때 "엄마, 이 책 보고 싶어" 하면서 찾더라고요.
혼자서도 괜찮은 날
어릴 때부터 혼자 노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었어요. 딸이 5살쯤 됐을 때였나. "엄마 심심해" 하면 예전엔 제가 바로 놀아줬어요. 근데 어느 날부터 "엄마 지금 설거지해야 해. 30분 뒤에 놀아줄게. 그때까지 레고 해볼래?" 했어요.
처음엔 5분도 못 버티고 나왔죠. "엄마 심심해!" 그럼 "조금만 더, 엄마 곧 끝나" 하면서 보냈어요. 한 달, 두 달 지나니까 늘더라고요. 10분, 15분, 30분. 지금은 "엄마, 나 혼자 놀 거야" 하면서 방문 닫고 들어가요. 한 시간쯤 지나서 나와요.
레고도 하고,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인형 놀이도 하고. 심지어 요즘은 혼자 상상 놀이 하면서 중얼중얼 대사도 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친구 없으면 세상 끝난 것처럼 느끼는 아이 vs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운 아이. 후자가 훨씬 덜 다쳐요. 친구한테 차여도 "뭐, 나 할 거 많은데" 하면서 금방 털고 일어나요.
요전에도 그랬어요. "엄마, 오늘 쉬는 시간에 친구들 다 줄넘기 하는데 나만 안 해줬어." 했길래 속으로 '아이고' 했는데, 딸이 "그래서 나 도서실 가서 책 봤어. 재밌었어" 하더라고요. 혼자서도 괜찮다는 자신감. 이게 있어야 친구 관계에서도 당당해져요.
요전에 딸이 친구한테 진짜 심하게 상처받고 왔어요. 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멍하니 있더라고요. 저도 마음이 아팠어요. 근데 제가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친구 관계에 끼어들 수도 없고, 대신 사과할 수도 없고. 그냥 옆에 있어줬어요. "속상하지? 엄마가 옆에 있을게."
그랬더니 한참 있다가 딸이 제 무릎에 머리 기대더라고요. 한 20분쯤 그렇게 있었나. "엄마, 배고파." "어, 뭐 먹을래?" "떡볶이!" 그렇게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갔어요. 친구 문제는 아직 안 풀렸는데, 딸은 웃고 있더라고요. 아, 이거구나. 엄마는 문제 해결사가 아니라 그냥 든든한 나무 한 그루면 되는구나.
친구 관계에서 상처 안 받는 아이는 없어요. 하지만 상처받아도 금방 털고 일어나는 아이는 있죠. 집에 기댈 곳이 있는지, 혼자서도 괜찮은지, 친구의 날씨에 휩쓸리지 않을 우산이 있는지. 그게 진짜 엄마의 역할인 것 같아요. 오늘도 친구 때문에 울고 웃는 우리 아이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엄마들. 우리 조금만 더 버텨봐요. 결국엔 다 지나가는 날씨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