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일기가 글쓰기의 시작이었어요

딸이 일곱 살 때 학교에서 일기 숙제가 나왔어요. 첫날, 빈 공책만 한참 쳐다보더니 "엄마, 뭐 써?" 했어요. 한 줄도 못 쓰겠다는 표정이었죠. 억지로 쓰라고 하면 일기가 숙제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바꿨어요. "일단 그림부터 그려볼까?" 딸이 눈이 반짝였어요. "그림 그려도 돼?" "응, 오늘 뭐 했는지 그림으로 그려봐." 그날부터 그림 일기가 시작됐어요.

그림부터 그리게 했어요

2023년 6월 5일, 아이가 서울랜드 나들이를 다녀온 뒤 정성껏 작성한 그림 일기 사진. 왼쪽 페이지에는 울고 있는 표정과 하트가 그려진 옷을 입고 웃는 표정의 아이 그림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언니, 이모와 함께 보낸 즐거운 하루를 또박또박 기록한 한글 일기

첫날은 그림만 그렸어요. 학교에서 친구랑 놀았던 걸 그렸어요. 막대기 사람 두 명이 손잡고 있는 그림이었죠. "이게 뭐야?" "나랑 ○○이야. 같이 놀았어." "재밌었구나. 여기 한 줄만 써볼까? '○○이랑 놀았다.'" 딸이 또박또박 썼어요. 딱 한 줄이었지만 시작이었어요.

둘째 날도 그림부터였어요. 급식 먹는 그림 그렸어요. "오늘은 뭐 먹었어?" "떡볶이!" "맛있었어?" "응!" "그럼 '오늘 급식으로 떡볶이 먹었다. 맛있었다.' 써볼까?" 두 줄 썼어요.

그림을 그리니까 할 말이 생기더라고요. 빈 공책 앞에서는 막막했는데, 그림 그리고 나니까 "이거 뭐야?" "왜 그랬어?" 물어보면 술술 대답했어요. 그 대답을 글로 쓰기만 하면 됐어요. 사실 교육학적으로 보면 그림은 아이들에게 생각을 구체화하는 '시각적 사고(Visual Thinking)' 도구가 되어주거든요. 그림이 글쓰기의 문턱을 확 낮춰준 셈이죠.

억지로 길게 쓰라고 안 했어요

처음 한 달은 한두 줄밖에 안 썼어요. 억지로 길게 쓰라고 하면 아이가 지칠 것 같아, 분량보다는 매일 한 줄이라도 쓰는 '꾸준함'에 더 공을 들였거든요. 무엇보다 쓰는 행위 자체가 습관이 되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오늘은 뭐 그릴까?" "음... 체육시간!" 체육시간에 달리기한 그림 그렸어요. "달리기 재밌었어?" "아니, 힘들었어." "그럼 '체육시간에 달리기했다. 힘들었다.' 써볼까?" 썼어요. 어떤 날은 진짜 딱 한 줄 "비 왔다" 그것만 써도 "오늘 날씨를 기억했구나. 좋은데?" 하고 칭찬해줬어요. 짧아도 괜찮았어요.

 딸이 그림을 그리면 제가 계속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끌어내 줬어요. "이게 뭐야?", "어떤 친구랑 줄넘기했어?" 물어보면 대답이 줄줄 나왔고, 그걸 정리해서 문장으로 옮기도록 가이드만 잡아준 거죠. 제가 문장을 만들어준 게 아니라, 딸이 뱉은 말을 정리만 해준 거예요. 가끔은 딸이 먼저 "엄마, 나 오늘 급식이 맛없었어. 이것도 쓰고 싶어"라며 스스로 쓰고 싶은 게 생기는 걸 보며 참 대견하더라고요.

일 년 후엔 혼자 썼어요

일 년쯤 지나니까 딸이 혼자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옆에 없어도 그림 그리고 문장 쓰고, "엄마, 일기 다 썼어!" 하며 자랑까지 하더라고요. "오늘 학교에서 미술시간에 나무를 그렸는데 선생님이 잘 그렸다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는 식으로 문장도 엄청 늘었죠.

가끔 웃긴 문장도 썼어요. "오늘 엄마가 화났다. 내가 양치를 안 해서 미안하다." 솔직하더라고요. "이거 일기에 써도 돼?" "응, 사실이잖아." 웃으면서 넘어갔어요. 심지어 이제는 일기나 독서록뿐만 아니라, 가끔 저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도 써주곤 해요. 10살 지금, 학교 글짓기 대회에도 나가보고 글 쓰는 것 자체를 즐기는 아이가 된 걸 보면 그때 그림부터 시작하길 참 잘했다 싶어요.

돌이켜보면 그림이 정말 중요했어요. 빈 공책 앞에서 막막해하던 아이에게 그림은 생각을 끌어내는 가장 좋은 열쇠였거든요. 글쓰기가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빈 공책 대신 스케치북을 먼저 내밀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매일 조금씩 쌓인 그림 일기가 훗날 탄탄한 문해력의 뿌리가 되어줄 거예요. 저에게는 스케치북이 아이의 글쓰기 문을 열어준 소중한 시작이었답니다.